헉 좀비 제임스 보고싶음 뇌와 사고만이 살아있는 죽은 몸


원래 헤르만이랑 제임스랑 서로 마음이 있다는건 알았는데 각자의 사정때문에 정식으로 뭐가 있는 사이는 아니었고...언젠가 마야를 찾고 서로의 불행이 끝나면 그땐...<-이정도의 얘기는 했었던 사이

마야를 찾고 헤르만은 제 그림자를 잘라냈지만 제임스는 그 직후 고통이 사라지기도 전에 몸이 못버티고 죽었으면 좋겠다 B의 묘비에 묻힌 제임스와 다시 상실을 뒤로하고 가는 헤르만...맞아 갈사장님은 견뎠을거같아 살고싶어하는 사람이었으니

그렇게 몇년이 흐르고 제임스가 관속에서 눈을 떴으면 좋겠다 그냥 자고 일어난것처럼..여긴 어디지 마야는 깨웠던가 내가 쓰러졌던가...어둡다 드디어 눈이 멀었나..하고 손을 뻗으면 관뚜껑이 있고 제임스는 뭔가 이상하는걸 깨닫겠지

주변을 더듬어서 찾아낸 검으로 어찌저찌 무덤에서는 헤집고 나왔는데 제임스는 아직 사태파악이 안될거같다..몸도 머리도 아직 찌뿌드드하고 멍한데 주변은 뭔가 익숙한 느낌이고 인적 드문 새벽을 걷고 걷고 걸어서 도착한게 까마귀 서점이라거나

아직 서점은 안열었고 제임스는 무슨생각인지 그앞에 자기가 누굴 기다리는줄도 인지 못한채로 그냥 앉아서 마냥 누군가 서점문을 열어주길 기다리겠지...쪼그려 앉아서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은 안으로 햇볕이 완전히 비집고 들어올때 쯤에야

누군가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자기 이름을 부를거야, 블레이드? 하고. 그럼 제임스는 고개를 들고 웃겠지. 저 왔어요,차마 그사람을 지칭하지는 못하고. 아직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제임스도 피부로 느꼈겠지 이게 자연스러운 재회가 아니라는것.

제임스는 눈떠보니 몇년이 지나있는 세상이 아직 얼떨떨할거야. 이젠 주홍빛 핏기까지 가셔서 투명할만큼 창백해진 피부라던지, 뛰지 않는 심장이나 의식하지 않으면 호흡하지 않는 폐도. 녹슨 검과 아직 흙냄새가 가시지 않는 몸같은 것도.

헤르만은 단지 몇십분 정도 제임스의 등장을 당혹스러워했을 뿐, 이내 평정을 되찾고 지금이 몇년도이며 제임스가 몇년전 죽어 땅에 묻혔음을 일러주고 제임스에게 손거울 하나를 쥐여주었을 뿐 그 이후 제임스에게 더이상 관심을 갖지 않았지.

요새 들어는 꽤 자주있는 일이라고 했어. 마야의 꿈에 의해 창조된 뒤 죽은 자들은 종종 시체의 몸으로 되살아나기도 한다고. 헤르만은 덤덤하게 설명했고 제임스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어. 더이상 그에게 말을 붙여선 안될것같다고 생각했으니.

무의미하게 시간이 흐르고 문을 열고 들어온건 어떤 여자였지. 풍선껌을 씹으며, 언젠가 헤르만이 묘사한대로, 그러나 조금더 자란 몸을 한 여자가 오빠, 하고 헤르만을 불렀고 헤르만은 왔니, 하고 대꾸했어. 제임스는 그 억양이 익숙했지.

언젠가 눈빛과 말씨만으로 서로의 마음을 짐작하고 있을 즈음 헤르만이 절 그렇게 맞아주었으니까. 둘의 관계를 눈치채고도 제임스는 무덤덤했어. 별로 상처받지 않았지. 케이가 먼저 제임스를 눈치채기 전까지 제임스는 별다른 반응도 하지않았음

좀비들에게 꽤 우호적인 케이가 제임스와 통성명을 하고 이것저것 제임스를 챙겨줄 때도 제임스는 일말의 불편함 없이 그저 감사해했어. 하나도 불편해하지 않았지. 자신이 느껴야할 불편함까지 헤르만이 모두 불편해하는 것 같다고는 느꼈지만.


애석하게도 시간은 흘러 서점의 폐점시간이 되고 제임스는 갈곳이 없었어. 서점 불을 끄고 나설때에도 멀뚱히 쇼파에 앉아있던 제임스를 보고 헤르만이 그제야 한숨을 쉬고 그를 불렀지. B, 지낼 곳이 구해질 때까지 방 하나를 내어주겠다.


제임스는 여전히 멀뚱하게 헤르만을 따라 그의 집으로 가 지내게 되었지. 작은 방 한켠에 놓인 간이 침대에 누워서 제임스는 잠시 고민했어. 오늘은 한번도 헤르만을 불러본적이 없었지. 내일부터는, 아니 이제부터는 그를 뭐라고 불러야할까.


그는 이제 S가 아니야. 그는 그림자를 잘라냈어. 아저씨라기엔 너무 친근하지. 헤르만, 은. 내가 그의 본명을 부를 주제는 아닌것 같아. 선수일때 쓰던 별칭이지만 잭도가 제일 좋겠다. 잭도, 제임스는 중얼거려보았지. 어색한 억양으로.


제임스를 블레이드라고 부르는 잭도와 헤르만을 잭도라고 부르는 블레이드의 산송장은 그렇게 한 집에서 지내겠지...잭도는 내심 둘 사이가 불편할까봐 걱정한것같다고 블레이드는 생각했어. 그러나 생각보다 그렇게 둘 사이가 답답하진 않았음.


제임스는 주로 헤르만이 서점에 가고 없는 시간동안 헤르만의 집에서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거나 혹은 집안일을 했지. 그러다가 종종 퇴근하고 돌아온 헤르만에게 실수로 자른 몸의 말단-보통 손가락-같은것을 내밀면서 꿰매달라고 하기도 했어.


헤르만은 그럴때에서야 겨우 제임스가 이미 한번-아니, 두번이거나 혹은 셀수 없을 만큼 아주 여러번-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실감했고 제임스는 쭈뼛거리면서 감사를 표하고 꿰매어 붙인 자리를 움직여보았어.


혹은 헤르만을 따라 까마귀 서점에 가서 점원 노릇을 하곤 했어. 그러면 이내 케이가 와서 헤르만과 투닥거렸지. 케이가 오면 헤르만은 유난히 제임스를 불편해하는것 같아서 제임스는 멋쩍게 서점의 구석진 곳에 숨어 책을 읽거나 하기도 했음


눈이 나쁘니 책을 잘읽지 못해서 제임스가 읽는 것은 보통 글자가 크고 그림이 많은 동화책이었어. 그렇지만 제임스는 그것들이 나쁘지 않았지. 앉은 자리에서 서점의 동화책들을 하나 둘 꺼내서 눈 가까이 대고 뜯어읽다보면 시간은 금방갔어.


제임스는 까마귀 서점의 구석에서 인어공주 이야기를 처음 읽었어. 그런 이야기가 있다더라~하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다지 행복한 어린시절을 보내지 못했고 머리가 커졌을 땐 눈이 나빠졌던 제임스는 그 이야기를 책으로 읽은 것은 처음이었지.


제임스는 그리고 산송장인 몸뚱이의 장점을 하나 발견했지. 송장인 몸은 눈물을 흘릴 줄 몰라 가면으로 눈물도 표정도 감출 필요가 없었어. 제임스는 아주 다행이라고 생각했지. 동화책을 읽고 우는-그것도 시체인-열아홉살은 꼴불견이니까.


헤르만이 조금 불편해하긴 했지만 케이와 이야기하는 건 재밌는 일이었지. 헤르만이 제임스에게 그다지 말을 걸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케이는 제임스의 유일한 말상대였고 대화를 이끌줄 아는 타입이라 제임스도 대화를 하는데에 어려움이 없었어.


케이는 종종 바깥의 일들도 얘기해주곤 했어. 요새도 종종 좀비가 깨어나는데, 이성을 잃고 생각할줄 모르는 것들로 되살아나는 자들이 많아. 사람을 닥치는 대로 공격해서 사상자도 났다고 해. 그래서 정부가 뭔가 대책을 세우려는 모양이야.


그때까지만 해도 제임스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지. 그저 그렇구나, 하고 넘겼어. 헤르만과 함께 서점에 가다가 생면부지의 행인이 제임스에게 돌을 던지고 세상에 나타나선 안됐던 것, 이라고 윽박지르기 전까지는 실감이 잘 안났으니.


임스는 사실 그때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어. 너같은건 죽어 마땅해,없어져버려, 같은 이야기는 제임스도 모르는 새에 아주 큰 트라우마였었나봐.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고 굳어있는 제임스에게서 행인을 떼어낸건 헤르만이었으니.


팔뚝을 잡혀 헤르만이 이끄는 대로 서점에 들어가 헤르만이 제임스의 이마를 걷어보고 반짇고리를 꺼냈어. 돌의 모서리에 좀 찢긴 모양인지. 제임스는 그때도 죽은 몸이 감사했지. 눈물이 났다면 아마 그 길바닥에서부터 울고있었을지도 모르니.


제임스는 곧 덤덤해졌지. 온몸을 지지는 고통에도 덤덤해지려 했는데,무엇에 덤덤해지는건 제임스에게 어렵지 않은 일이었어. 외려 제임스 대신 헤르만이 뉴스를 찾아보곤 했지. 좀비박멸을 연호하는 시위대와 정부가 내놓는단 좀비 대책에 관한.


제임스는 그렇게 기사를 찾아보는 헤르만에게 종종 '왜 그런것을 신경써요, 잭도?'하고 묻고 싶은걸 참았어. 제임스는 참는게 익숙했으니 호기심 쯤이야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지. 그러나 제임스도 가끔 참는게 아주 어려울 때가 있기도 했어


그날은 정부의 좀비대책이 발표된 날이었지. 여론조사에 의해 좀비들을 집집마다 모두 수거해 소멸시키기로 의결이 되었어. 숨겠나, 블레이드? 원한다면 숨겨줄 수 있어. 저보다도 불안한 얼굴로 다그치듯 묻는 헤르만이 제임스는 더 의아했지.


글쎄요. 제임스는 뭉뚱그려 대답했어. 실제로 제임스는 그다지 사라지고 싶지 않다거나 하지 않았거든. 제임스에게 죽음이란 늘 아주 가까이 맞닿아 것이었으니, '세번째 죽음'이 제임스에게 어떤 큰 감회를 주기란 아주 어려운 일이었거든.


헤르만은 며칠을 제임스에게 도망치지 않아도 괜찮겠냐 물었지만 제임스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어. 뉴스에서 처음으로 '수거'된 좀비들이 주홍빛 불꽃에 재가 되는 것을 보면서도 그저 저와 주홍색은 참 인연이 질기구나 생각했을 뿐이었지.


제임스에게 첫번째 삶은 누군가에게 필요하고싶어 발버둥쳤으니 의미가 있었고 두번째 삶은 누군가에게 필요 했으니 의미가 있었지만 세번째 삶은 별다른 의미가 없었지. 어차피 죽은 목숨을 부지해보려고 헤르만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어.


공고장이 온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고, 헤르만이 경찰의 눈을 피해 집안의 문을 걸어잠그고 커텐을 친 것은 또 그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지. 다락에 제임스를 앉혀두고 여기에 있으라는 헤르만을 보고 제임스는 더 궁금증을 참기가 힘들어졌어.


왜 저를 살리려 하나요, 잭도.


네 죽음을 다시 견딜 자신이 없어서.


이미 경찰들은 문을 두드리고 있었지. 쾅쾅. 제임스는 어느덧 제 앞에 엎드리듯이 앉아 우는 헤르만을 보았어. 쾅쾅쾅. 그랬군요. 맞아요, 당신은 살고싶어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버텨주겠지 하고 두번째로 죽기전에도 생각했었어요. 쾅쾅.


당신은 잘 할거에요. 잘해왔으니. 이제는 눈물을 흘려도 그림자가 길어지지 않는군요. 정말로 그림자를 잘라냈군요, 잭도. 수고했어요. 그림자가 길어지던 때에도 길어지지 않는 때에도 나를 사랑하지 않느라 수고했어요.


문 두드리는 소리는 멎지 않았고 한때 블레이드라 불렸던 제임스는 처음으로 한때 잭도라 불렸던 헤르만을 끌어안고 보듬었지. 사랑하지 않기 위해 모든 생을 다 바쳐야했던 남자를 끌어안고 처음으로 눈물이 나오지 않는 죽은 몸을 원망하였음.

아 화력딸림..여튼 제임스는 울고 있는 헤르만을 놓아두고 경찰을 따라 주홍색 화염에 제 몸과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기 위해 발버둥쳤던 시간의 헤르만을 맡기고 사라질 것 같다. 그리고 헤르만은 계속 살아나가겠지. 살고싶어하는 사람이니까.


걍 외전격으로. 제임스는 아마 (그게 악의에 의한것은 아니겠지만) 더이상 헤르만이 내게 정이나 마음을 주려 하지 않는구나 하는걸 눈치챘을 거 같음. 물론 헤르만이 케이와 사귀고 있고 그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도 눈치채고 있고...

아 물론 그렇다고 헤르만이 제임스를 잊기 위해 케이를 택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제임스를 잊으려고 발버둥치는 마음의 틈에 케이가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온거고 사귀게 된거고 헤르만은 실제로 케이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을거고 제임스를 더 빠르게 잊어가고 있었고 삶의 행복감을 얻었을것..이라고 생각

근데 하필이면 그 앞에 제임스가 다시 나타난거겠지 실제로 제임스의 거처만 정해지면 거기로 보내버리려고 했을 것. 추억하는 것은 괴로우니까. 이젠 사랑할 수 없는 아이니까. 케이랑 제임스가 있는걸 불편해한 것도 케이를 보면서 제임스를 떠올리게 될게 싫어서 케이랑 제임스의 접점이 없었으면 했기 때문

제임스는 그걸 알고 헤르만에게 맞춰줬다고 생각한다 호칭을 바꾼 것도 케이와 헤르만의 관계를 알고도 질투하거나 분노하지 않았던 것도, 헤르만의 냉대든 배려든 그걸 무덤덤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인것도...세번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도.

어차피 자긴 죽은 사람인데 헤르만이 다시 정을 줘서 괴로워하게 만들 필욘 없다고 생각했을거고. 왜 나를 살리려하느냐는 질문도 안하려고 꾹꾹 참다가 반쯤은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거겠지

그러다 헤르만이 여지껏 제임스의 죽음을 버티고 견디며 살아가고 있었다는 걸 듣고 나서야 감히 헤르만을 위로할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다시 혼자서 잊으려고 괴로워하지 않았으면 해서 나를 잊으라는 말은 감히 할수 없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느라 수고하였다고...

그렇지만 제임스가 슬프지 않았다고는 하지 못하겠다...죽은 몸이라 눈물이 안나서 그렇지 살아있었더라면 눈물이 났을 수도 있겠다 싶었던 순간은 생각보다 꽤 많았을 것. 인어공주를 읽고 운것도 어쩌면 스스로를 인어공주에 대입했기 때문일수도 있다...헤르만이 제임스의 죽음에 얽매여있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사실 제임스도 조금은 버림받은 기분이기도 했을테니






연출을 좀 잘햇으면 좋았을텐ㄷㅔ 그런건 배워본적이 없어서..

글존잘님이 써주셨으면 좋겟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썰

분명 온 단물이 빠질때까지 우려먹게 될지도 모른다...

'투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최군 낙서  (0) 2015.05.01
[갈가B]이름  (0) 2015.05.01
최군 낙서  (0) 2015.04.18
paradise lost B  (0) 2015.04.12
최군 연성1  (0) 2015.04.12


사실 그냥 하단광원 연습하고 싶어서 그렸던 B

얘는 신을 믿을 것 같지는 않지만...

신보다는 당장 제 아픔을 가시게 할 약같은 것을 신봉하면 모를까











'투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최군 낙서  (0) 2015.05.01
[갈가B]이름  (0) 2015.05.01
최군 낙서  (0) 2015.04.18
paradise lost B  (0) 2015.04.12
갈가B 좀비썰  (2) 2015.04.12





















'쩜오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참치필모 백업  (0) 2016.01.17
ㄱㅇㅅㅈㄷ 백업  (0) 2016.01.17
정문휘경정문 조각  (0) 2015.01.09
틴님드릴 휘경정문  (0) 2014.12.16
태수정문  (0) 2014.12.10

휘경은 정문과 제가 태초에 하나의 수정란이었다는 것을 저주하게 된 뒤부터 머리를 옅게 물들였다.

자신보다 3분 앞서 빛을 본 쌍둥이 형 정문을 휘경은 여느 쌍둥이 동생들과는 다르게 잘 따랐다. 우애도 좋은데 쌍둥이라 닮기도 꼭 닮았네, 하는 말들이 듣기 좋아 옷도 꼭 같은 것을 두 벌씩 사 나눠 입었고, 미용실도 정문의 손을 잡고 가서 정문이처럼 잘라주세요, 하곤 했다. 눈 앞을 살짝 가리는 검은 생머리를 어린 휘경은 퍽 좋아했었다. 머리가 크고 교복을 입고 나서도 동네 미용실에는 꼭 정문의 손을 잡고 갔다. 정문과 휘경의 어머니 또래의 미용실 원장은 그걸 보고는 깔깔 웃었다.

그로 몇년이 지났을까, 인류가 몸을 의탁했던 행성은 뜻밖의 최후를 앞두게 되었다.

휘경은 지직거리다가 다시 전파를 놓친 텔레비전의 꺼진 화면을 들여다 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앞으로 30분 뒤에 지구에 도착할 거대 운석과, 인두겁을 벗고 미쳐 날뛰는 짐승들을 보여주던 텔레비전 화면은 검게 변했다. 그 매끈한 표면에 비친 저를 가만히 노려본다. 요며칠 제대로 먹지 못한 얼굴이 전에 없이 말랐다. 온수가 끊긴 것인지 찬물에 감은 옅은 갈색 머리카락이 형광등 불빛에 부스스 쪼개져 있는 것이 비친다. 독한 파마약과 염색약에 가늘고 약해진 모발은 정문의 짙고 매끄러운 그것과 섞일 때 확연한 차이가 났다. 바닥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구분지을 수 있다는 사실은 휘경과 정문이 저지른 배덕의 증명이기도 했다. 휘경은 제 손을 잡아 끄는 정문의 손에 다르게 약동하는 제 심장을 자각한 날에 정문이 모르게 머리를 잘랐고, 한 여학생을 여자친구라며 소개시켜주는 정문을 뒤로 하고 제 교실로 뛰어들어가 엎드려 흐느끼던 날에는 염색을 했으며, 정문의 꿈으로 아닌 밤 중에 속옷을 적신 다음날에는 펌을 넣었다. 

그것은 원망였을까, 소망이었을까.

피는 물론 모든 유전조합까지 나눠 가지고 태어난 인간에게 안될 마음을 품게 한 운명에 대한 원망이었나? 

그럼에도 그 모든 사실들을 부정한 채, 제 감정에 솔직하고 싶었던 소망이 일으킨 애처로운 몸부림이었나?

이불 사이에서 마른 손이 나와 앉아있던 휘경의 목 뒤를 감싸 내리고 조심히 받쳐 눕힌다. 정문아, 하고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입술을 겹치고 잇새를 벌리는 몸짓에 휘경은 눈을 감았다. 두 벗은 몸을 덮은 이불이 작게 바르작거린다. 이내 급한 숨을 토해내며 떨어진 두 닮은 얼굴이 서로를 가만히 마주 보았다. 이어진 두 시선은 불과 몇주 전과 다르게 흔들림이 없었다. 깨어지지 않을 영원처럼 침묵은 평온하게 흘렀다. 양수처럼 따스한 침묵이다. 두 사람은 그 침묵만으로도 행복했지만, 문득 서로의 목소리가 그리울 때도 있었다. 먼저 입을 뗀 것은 휘경이었다.

"나 일어난지 얼마나 지났어?."

"아마 20분 정도."

"그럼 10분 쯤 뒤에 운석이 지구에 도착하겠다."

"응."

"아무리 해도 방법이 없대. 미국도 러시아도 중국도 그 운석을 쏘아 떨어뜨릴 무기는 가지고 있지 않대."

"알아."

"어쩌면 운석이 부딪히면서 땅도 바다도 아주 뒤집어져서 지구가 처음 태어났을 때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나봐."

"응."

"무섭지 않아?"

"아니."

정문이 가만히 고개를 젓는 몸짓에 따라 두 사람 위를 비추던 형광등이 위태롭게 깜빡거렸다. 더이상 들어오지 않는 보일러 때문에 집 안은 차가운 공기가 감돌았지만 둘은 따로 체온을 덥히기 위한 무언가를 마련하려 하지는 않았다.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양. 점멸하는 형광등 아래에서 정문의 고갯짓을 보던 휘경은 엷게 웃었다. 정문이 사랑하는 웃음이었다. 정문이 말없이 손을 뻗치자 휘경은 그 팔을 끌어 좀더 가까이 했다.

"나도."

"..."

"하나도 무섭지 않아."

두 사람은 빈틈없이 서로의 몸뚱아리를 부둥켜 안았다. 하나의 세포였던 태곳적처럼.

'쩜오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참치필모 백업  (0) 2016.01.17
ㄱㅇㅅㅈㄷ 백업  (0) 2016.01.17
이때까지 그린 건캐즈 백업  (0) 2015.01.25
틴님드릴 휘경정문  (0) 2014.12.16
태수정문  (0) 2014.12.10

+ Recent posts